도가문 (도가 태극권 한국 총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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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8 - [도가문(태극권)] - [도가문] 거만고양이 태극권에 빠지다.. ㅎ 무당/양가 태극권


이아헌 노사 일대기

이아헌(李雅軒)은 양가태극권 종사이신 양징보 노사의 훌륭한 제자로서, 10여년간 양사부를 따랐다. 태극권·검·도·창·추수·산수 등의 기술이 완벽하고 조예가 깊었으며, 태극권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그는 시종일관 양가태극권의 순수한 품격을 보존하였으며, 무덕(武德)이 높고 학문이 완전하여 문하생이 천하에 가득하였으니,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한 분이다.
이아헌(李雅軒)은 이름은 춘년(椿年), 자는 아헌(雅軒)이며, 1894년 하북 교하현(河北 交河懸)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여 공식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글방에서 몇 년간 수학하였다. 그의 마을은 무풍(武風)이 성행하였기 때문에 이아헌은 어려서부터 상무(尙武)정신의 영향을 받아 무술을 매우 좋아하였다. 장이 설 때마다 먼 길의 고생스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술을 보기 위해 달려갔으며, 돌아온 후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곤 했다.
당시 그의 마을에는 소림권(小林拳)으로 유명한 무사 진전복(陳殿福)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아헌의 부모는 이아헌이 무술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를 진선생에게 데려가 소림권(小林拳)을 배우게 했다. 진선생은 이아헌의 타고난 자질과 총명하고 지혜롭고 강건한 성품을 보고는 흔쾌히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이아헌은 열심히 수련한 끝에 몇 년 후 공력이 매우 향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열댓 명의 불량소년들이 노상인을 모욕하는 것을 본 아헌은 참지 못하고 의협심을 일으켜 서슴없이 맞서 싸웠다. 불량소년들은 이아헌 한 사람뿐이라 가볍게 여기고 그를 둘러싸고 공격을 하였으나, 이아헌이 크게 노하여 주먹을 휘두르자 주먹이 닫기도 전에 한 장(丈)밖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나머지도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며 허겁지겁 도망갔다. 이때부터 이아헌의 무술은 마을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14년 이아헌은 만20세가 되었다. 이때부터 태극권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태극권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느 날 이웃 친구 장빈여(張彬如)의 집에 손님이 와서 이아헌도 같이 손님을 접대하게 되었다. 손님의 이름은 전해전(傳海田), 대화중에 그가 태극권을 수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시범을 보니 팔이 부드럽고 무력하였으며 보법도 느리고 반쯤 잠이 든 듯하였다. 그러나 실제 시합을 해 보니 바람과 그림자를 잡는 듯 느껴졌으며, 발은 온전하게 서지를 못하였다. 처음엔 우연한 실수라고 생각했으나 계속해서 넘어지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아헌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마음으로 감복하여, 다음날 당장 전해전에게 달려가 태극권을 배웠다. 전해전은 이아헌에게 태극권의 원리를 설명하였고, 이아헌은 몇 개월을 배운 후 태극권 이론의 심오함에 감탄하여 전해전을 정식 사부로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전해전은 “너는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고 이해력이 높으니 나의 이 정도 실력으로는 너의 스승이 될 수 없다. 나의 사부이신 양징보 스승님은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학문이 깊고 천하에 비할 데가 없으니 스승님에게 가서 다시 처음부터 배워서 너의 뜻을 이루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이아헌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다음날 짐을 꾸려 전해전의 소개서를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태극권 종사 양징보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부터 양가태극권의 문에 들어서 집중수련하고 한평생을 태극권 기술연구에 전념하고, 마침내 태극권 명사가 되었다.
1914년 이아헌은 정식으로 양징보를 사부로 모시게 되었고, 태극권의 권술을 전문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양징보는 이아헌의 인품을 중시하였고 그에 대한 희망이 깊었으며, 둘의 관계는 아주 긴밀하여 친부자 같았다. 태극권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이아헌에 대한 요구가 지극히 엄격하였고, 간곡하게 타이르며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쳤다. 이아헌은 이해가 가장 빨랐고 공력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했으며, 양사부가 시범을 보인 동작은 집중하여 연습하였다. 형(形)뿐만 아니라 신(神)을 중점적으로 익혔으며, 한 동작을 수백 번 수천 번씩 연습하여 양사부가 만족할 때까지 하였다. 하체의 공력을 단련하고 다리 힘을 기르기 위하여, 태극권 행보(行步)를 연습할 때는 기복(起伏) 동작을 하지 않고, 사형사제를 불러 힘껏 사타구니를 아래로 누르게 하고는 행보를 하였다. 한 번 걸음을 옮기면 몇 시간을 쉬지 않았고 행보하는 길을 따라 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수십 분을 계속하다보면 땀이 흘러 등에 배고 옷에 스며들었으나, 양사부가 멈추라고 외치지 않으면 절대로 멈추지 않았고, 밥을 먹거나 길을 걷거나 잠잘 때도 태극권 동작을 연습하였다. 한밤중에도 날이 춥든 땅이 얼었든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걸치고 나와서는 먼저 생각이 났던 바를 체득하고 기억한 후, 양사부와 추수·발경하는 동작을 완벽하게 깨달을 때까지 연습하였다. 사형사제들은 한결같이 “아헌이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은 귀신에 홀린 듯하다”고 말했다. 양징보는 “아헌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은 너희들이 따를 수가 없고, 애써 노고를 견디고 열심히 연구하는 정신도 너희들이 따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1928년, 양징보 사부는 남경중앙국술관(南京中央國術館)관장 장지강(張之江)의 요청으로 남경(南京)으로 가서 국술관의 교무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이아헌은 집안문제 때문에 사부와 동행할 수가 없어 마음이 매우 초조하였고, 결국 그 해 겨울, 집안의 미미한 가산을 모두 팔아 여비를 마련하여 사부를 찾아 남경으로 떠났다. 남경에 도착해보니 양사부는 이미 1달 전에 남경국술관을 사직하고 다른 지방으로 떠나고 계시지 않았다. 낮선 땅에서 여비는 바닥났고 사고무친인 아헌은 남경국술관에서 교수반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험에 응시하기로 결심했다. 합격하게 되면 객지생활동안 잠시라도 머물 곳이 생기게 되고, 또한 천하의 명고수들을 접할 수 있으며, 천천히 사부의 소식을 접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험에 응시하고 태극권과 태극대창을 시범보였는데, 그 기백이 웅장하고 기세가 힘찼으며 펼쳐짐이 우아하고, 정(精)하기는 산과 같고 동(動)하기는 강하와 같았다. 특히 태극대창은 사람들의 강한 주목을 받았다. 시험결과는 원래 이아헌이 1등이었으나 국술관 관장인 장지강의 학생이 응시한 관계로 1등은 그 학생에게 돌아갔고, 이아헌은 2등을 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이아헌은 이 때부터 잠시동안 남경국술관에 머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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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이아헌은 양사부가 항주(杭州)의 절강성국술관에서 교육장을 맡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항주로 사부를 찾아갔다. 사부를 만난 이아헌은 태극권의 공력을 더 깊이 연구하였고, 1934년까지 절강성국술관에서 태극권 주임교수의 직위를 맡게 되었다. 1934년 남경에서는 태극권사(太極拳社)를 조직했는데, 이아헌은 남경으로 가서 태극권사(太極拳社)사장을 맡게 되었고, 1935년에는 남경국민체육학교에서 무술동상교(옛 관제명, 상교급 군관대우) 설계원을 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무술고수들이 양징보의 태극권 명성을 흠모하여 양징보를 찾아와 손을 맞대기를 원하였고, 이때마다 이아헌이 대응하였다. 이아헌은 무덕이 높았기 때문에 경솔하게 사람을 상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대련 시 상대가 넘어지면 바로 멈추었으며, 패자가 절대 부상을 입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아헌이 겉보기에는 매우 부드러우나 실제로는 사람을 놀라게 하고 무서워서 벌벌 떨게 만든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1937년 “77사변”, 항일전쟁이 일어났고, 같은 해 음력 11월, 일본군은 남경을 폭격했다. 이아헌은 남경을 떠나, 서주(徐州), 정주(鄭州), 한구(漢口), 무창(武昌)을 지나, 1938년 여름, 무한(武漢)이 위태로워지자 사시(沙市), 이창(宜昌)을 거쳐 중경(重慶)에 도착했고, 같은 해 가을 성도(成都)에 도착하여 이때부터 사천(四川)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아헌이 사천에 온 이후, 사천의 무술계는 태극권이 더해지게 되었다. 이아헌은 순수한 무술기법과 고상한 무덕(武德)으로 태극권을 사천에 뿌리내리고 발전, 보급시켰으며, 사천 무림계에서 태극권이 중요한 지위를 점할 수 있게 하였다.
1976년 4월 11일 향년 83세의 나이로 성도에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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